1. 서머싯Somerset 판결
1765년 어느날 이었습니다.
런던에 살던 그랜빌 샤프라는 청년은 의사인 형을 만나로 갔는데, 거기서 어떤 흑인 노예가 주인에게 권총으로 얼굴을 맞아 엉망이 되어 있는 광경을 목격합니다. 그 노예의 이름은 조너선 스트롱이라고 하였으며, 스트롱에게 자초지종을 물어보니 그는 자메이카인 농장의 주인에게 죽도록 얻어 맞은 것이었고, 주인은 죽어가는 그를 버렸던 것이었습니다. 다행이 치료를 받은 스트롱은 2년뒤에 다시 런던으로 돌아온 주인과 뜻밖에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노예팔이를 하던 주인은 깡패를 불러서 조너선 스트롱을 다시 납치 해버렸습니다. 납치된 스트롱은 자기를 한번 도와주었던 의사 형제에게 편지를 보냈고, 이 편지를 본 샤프 형제들은 화가 났습니다. 샤프형제들은 인맥을 동원해서 런던시장을 찾아가서 조너선 스트롱의 어려움을 말했고, 시장은 이말을 듣고 공청회를 열었습니다. 공청회 결과 스트롱은 풀려났습니다. 그런데 이 공청회는 노예를 강제로 팔아서 돈을 벌던 런던을 발칵 뒤집게 되었고, 반대로 샤프 형제는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법률가들을 모아서 주인들에게 학대 받는 노예를 보호하는 소송들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잉글랜드는 암암리에 모두 흑인 노예를 사용하고 그들을 학대 하고 매매 하면서 경제적 이득을 취하고 있었는데,
사실 그런 행위가 법적으로 규정화되어 있지는 않았습니다. 샤프형제는 이 법적인 맹점을 파고 들었고, 한번도 '노예를 합법화' 한적이 없었던 영국 법원은 1772년 '서머싯Somerset 판결'을 통해서 '잉글랜드로 끌려온 노예는 폭력적으로나 강제적으로 노예를 대할수 없고, 임으로 납치 할수도 없다'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노예에 대한 합법성을 부여하지 않았던 이 판결은 사람들에게 전파되고 전파되어서 '노예제가 폐지되었다' 로 확대되었고, 이 뉴스는 급히 미국의 뉴욕까지 소문이 났습니다.
뉴욕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영국처럼 당시 미국도 노예를 엄청나게 데려와서 똑같이 학대하고 매매 하면서 돈을 벌고 있었는데, 영국에서 노예제가 폐지 되면 미국도 당연히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었고, 이 판결에 불만을 품은 뉴욕의 백인들이 수많은 모임과 집회를 하게되자 심지어 뉴욕주지사는 '집회 금지' 명령을 내릴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까지 사건이 심각해졌습니다.
2. 노예무역
당시 유럽에서 노예는 그 자체로 '돈의 수단'이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강제로 잡아온 흑인 노예를 사탕수수밭에 노동을 시키면 설탕이 생산되고, 그 설탕은 다시 무역을 통해서 여러나라로 비싼 값에 팔려 또 이득이 생겼기에 노예는 그들의 돈벌이에 무엇보다 중요한 수단이었고, 이를 유지 하기 위해 '노예 무역상'들은 더욱 잔인하고 악날하게 흑인들을 대해왔었습니다.
영국의 노예제 폐지와 별개로 미국은 살아남을 방법을 찾아야 했습니다. 영국의 제도를 그대로 사용하면 자신들의 거대한 사탕수수밭의 노예를 풀어줘야 했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스스로 자생을 하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합니다. 자신들의 경제적 안정과 영국에서 계속 집행하는 강력한 세금 제도까지 겹치자 원래 영국이 본국이었던, 그러나 미국에서 노예를 이용하여 사업을 하는 사업가들의 마음숙에 영국에 대한 불만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노예도 없어지면 안될 것 같고, 홍차도 많이 팔아야 했고, 세금도 작게 내고 싶었던 북아메리카에 있었던 영국의 13개 식민지들의 입장에서 보면 본국의 노예해방정책은 청천벽력 같은 소리 였습니다. 불만이 쌓여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맘때쯤 그들의 불만을 '합리적으로 표현' 해준 사람이 나타납니다. 현재 우리가 '상식 common sense'라고 부르는 말을 최초로 탄생시킨 '토머스 페인 Thomas Paine'이 그 주인공입니다. 그는 그의 책 '상식'에서 북아메리카에 있는 영국 식민지들은 본국으로부터 많은 권리를 침해 받고 있고, 이를 식민지의 사람들은 알아야 하고, 침해 받는 권리를 주장해야 하는것은 당연한 '상식'이라고 말했습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에 한명인 '밴자민 플랭클린 Benjamin Franklin'은 '토마스 페인'의 이 주장을 적극 지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를 미국 본토로 직접 데려 온 사람이기도 합니다. 서머싯 사건, 즉 노예제도의 비 합법화를 시작으로 이제 '침해된 권한에 대한 자유 주장'이 미국 식민지에서 생겨나기 시작했을때 , 북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이 발발합니다.
당시 유럽의 귀족들은 북아메리카에서만 서식하는 '비버'의 모피가 선풍적인 인기였는데, 이 비버가 거주하는 지역이 미국과 캐나다 사이의 5대호 주변이었고, 이는 영국령 아메리카와 프랑스령 아메리카의 충돌지역이었습니다.
비버를 더 잡기 위해서 두 국가가 아메리카 대륙에서 전쟁을 벌였는데, 결과는 영국의 승리였습니다. 당시 프랑스는 대혁명과 나폴레옹의 등장으로 내부 정치가 엉망이었기 때문에 멀리 있는 아메리카 대륙의 전쟁에 집중하기 힘들었고, 영국은 이 전쟁에서 승리를 할 수 있었지만, 대신 영국 또한 전쟁으로 엄청난 재정파탄을 겪게 되었습니다.
3. 보스턴차사건과 미국독립
전쟁의 휴유증을 만회해야했던 영국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되었습니다. 바로 본국과 모든 식민지에 강력한 '세금정책'을 펼쳤던 것입니다.
이 세금정책은 첫째 모든 종이에 세금을 부과하는 '인지세법 the Stamp Act'과 둘째 모든 생필품에 세금을 부과하는 '타운젠트법 the Townshend Act '이 였습니다. 당연히 미국 식민지 사업가, 권력자들은 영국 본국의 지원은 받아본 적이 없고, 자꾸만 뺏어가기만 하는 영국이 미워집니다.
이 감정은 폭동에 가까운 형태로 번지고, 그 중심지는 보스턴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보스턴에 모여서 영국의 정책에 반대하는 시위를 펼쳤고, 이 세력은 너무 커서 영국에서는 마침내 미국 식민지의 요구에 한발짝 물러나, '홍차'만 세금을 메기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존 핸콕John Hancock'이라는 네덜란드 홍차 밀수업자와 일찌감치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주장했던 '사무엘 애덤스Samuel Adams'는 작전을 짰습니다. 원래 홍차는 매우 비싼 차였지만, 유럽각국이 앞다투어 식민지를 활용해서 홍차를 가져오게 되자, 점점 양이 늘어나면서, 당시 영국의 입장에서는 홍차가 많이 남아 돌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막 홍차를 열광적으로 소비하는 미국시장에 이 홍차를 풀어서 세금도 받고 판매수익도 올릴려던 영국의 정책에 대하여, 그동안 네델란드로부터 홍차를 밀수해서 큰 돈을 벌었던 존핸콕과 보스턴의 정치기반이 있었던 '사무엘 애덤스'는 영국의 홍차를 항구에서 바다로 던져버리고 불에 태워버리는 사건을 만들어 버립니다. '보스턴 차사건'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미국독립전쟁의 신호탄이라고 역사에 기록되어 있지만, 이렇게 원래 목적은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이 그 목적이었습니다. 심지어 당시 영국이 가져온 홍차의 가격은 기존에 미국에서 유통되는 홍차보다 훨씬 싼 가격이었습니다. 즉 일반 백성들에게는 영국의 정책이 훨씬더 좋은 정책이었을수도 있었습니다만, 미국의 정치가들은 자신들의 이익이 더 우선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서머싯 사건이후 4년만에 미국에서는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을 사수하기 위해서 영국으로 부터 독립하겠다는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게 됩니다. 1차와 2차에 걸친 모임, 소위 '대륙회의'라고 불리는 모임에 모인 사람들은 훗날 미국에서 자신들을 '건국의 아버지'라고 칭하며, 미국의 건국은 영국으로부터의 위대한 독립이라고 주장하지만, 역사에는 언제나 그 속에 숨은 '행간의 이야기'가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참고로 훗날 존 핸콕과 사무엘 애덤스는 둘다 메사추세츠 주지사를 지냈습니다. 게다가 자신의 홍차 사업을 방해받지 않고 싶어던 존핸콕은 미국의 독립선언서에 최초로 서명한 사람으로서도 유명합니다.
이렇게 미국의 독립배경에 대하여 간단히 알아봤습니다. 모든 일에는 배경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