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난징대학살의 배경
중국과 일본의 근대사중에 절대 잊을 수 없는 악연의 대표적인 사건을 꼽으라면 '난징대학살'이 빠질수는 없을것 같습니다.
30만명 이상의 선량한 사람들이 처참하게 학살당한 그때의 사건의 배경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요?
간단히 중국과 일본의 근세사를 이해하기 위하여 청나라 말기부터 이해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메이지유신(明治維新,1868년)으로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근대화를 성공한 일본은 무서운 것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일본인 스스로 자신들의 실력을 과신하기도 하였고, 또 한편으론 자국내의 경제를 더 발전시키고
제국주의(帝國主義, imperialism)의 큰 목적을 달성시키기 위하여 조선(朝鮮)을 발판으로 더 큰 대륙으로 나아가고 싶은 욕망이
극에 달하였습니다.
그 결과 조선의 동학농민운동(东学农民运动,東學農民運動)을 시발점으로 하여, 청나라와 일본은 조선에 대한 지배의견이 달라서 1894년 첫번째 전쟁을 벌였는데, 이것을 청일전쟁이라고 합니다.
청일전쟁은 청의 힘이 외세에 의해서 이미 많이 쇠약해진 상태였으므로, 일본의 승리로 끝이 납니다.
이로 인하여 일본은 엄청난 전쟁 배상금을 받고, 일본 정치인들은 더욱 더 강하게 대륙으로 나가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10년뒤 1904년 일본은 또 한번 거대한 제국, 러시아와 전쟁을 벌였습니다. 안타깝게도 두번의 전쟁은 모두 조선반도와 그 외곽, 그리고 중국으로는 산동반도와 요령반도를 중심으로 일어났으며,러일전쟁의 결과는 뜻밖에 청일 전쟁처럼 일본의 승리로 끝이 났습니다. 그러나 러일전쟁은 일본이 전쟁에서는 이겼지만, 러시아의 외교술로 인하여 일본이 전쟁의 댓가로 얻을 수 있는 금액은 얼마되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일본 내부적으로는 정치적인 분열이 일어났고 ,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일본은 더욱더 전쟁을 선택하게 됩니다. 그도 그럴것이 두번의 세계적인 대 제국(러시아, 청)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 군부는 '위대한 일본은 언제나 승리한다'라는 말도 안되는 신념을 가지게 되었고, 일부 일본내 전쟁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있었지만, 한번 생겨버린 광기(狂氣)는 막을 길이 없었던것 같습니다.
얼마지 않아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생하였고, 일본은 또 영국과 함께 전쟁에 참가하여 승전국이 되면서 엄청난 경제적 이익까지 얻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니, 일본내에서는 '군대'가 곧 법이였고, 국가였습니다. 덴노(天皇,천황)와 내각이 있었지만, 그 또한 군대의 세력 중에 일부였고,극히 일부 있던 평화주의 세력은 이미 전쟁에 미쳐버린 일본에서는 발언권이 거의 없었습니다.
전쟁을 하기 위해서는 돈과 물자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일본은 1910년 조선을 침략하고 강제통치 하였습니다.
그리고 조선을 발판으로 대륙으로 대륙으로 나아가기를 원했고, 이를 실행하기 위하여 군수뇌부(首腦部)에서는 '전쟁의 위험'쯤은 당연하게 생각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참고로 당시의 평균적인 일본 국민들은 '바지'를 거의 입지 못할만큼 가난했다고 전해집니다.
이런 격동의 시기에 중국은 청나라가 멸망하고 중화민국(中華民國)이 건국되며, 내부적으로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큰 혼란을 겪게 되었습니다. 5천년의 거대한 대륙을 이끌던 청은 당시에 세계화의 물결에 한발짝 늦게 눈뜬 이유로 인하여, 온갖 서양세력의 침략을 받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청의 몰락과 지방 세력의 분열도 시작되었습니다.
2. 일본의 광기를 맨몸으로 막아낸 푸른눈의 외국인
이번 글의 주제는 난징대학살(南京大屠杀)입니다. 언급한 것처럼 전쟁의 광기에 휩싸인 일본의 관동군(關東軍)은 군이 주도적으로 1932년 현재 중국의 동북3성, 즉 만주지역에 '군대가 지배하는 나라'를 세웁니다. 이를 만주국(滿洲國)이라고 합니다.
만주국을 거점으로 일본은 점점 중국의 내륙으로 침략을 해오던 어느날(1937. 7. 7) 북경근처 주둔지에서 훈련을 하던 일본군은
루거치아오(卢沟桥) 에서 일어난 작은 오해로, 중국에 대대적인공격을 시작하니 '중일전쟁'이 시작된 것입니다.
일본이 중국을 공격했던 사건이 된 '루거차오 사건'은 사실 오해였습니다. 병사를 집합시키다가 한명이 보이지 않자, 일본의 근대 역사상 가장 무능한 사령관으로 평가 받는 '무타구치 렌야(牟田口 廉也) '는 혼자 상상을 했습니다. 바로 중국군이 먼저 일본군을 총격사격 했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상급부대의 어떤 지시도 받지 않고 중화민국에게 대대적인 공격을 시작해버렸습니다. 훗날 밝혀진 바로는 당시 집합에 나타나지 않은 일본군 병사는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난징 대학살은 바로 이 중일전쟁중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중일전쟁은 일본의 생각보다 중국을 쉽게 정복할 수 없었으며, 이로 인하여 잔뜩 약이 오른 일본군은 정예부대를 모아서 장강하구로부터 난징(南京)까지상륙작전을 실시하였고, 마침내 난징에 도달하였지만 중화민국은 이미 사령부를 내륙인 충칭(重庆)으로 이동시킨 상태였고,일부 남아서 난징을 방위하던 중화민국 군대도 일본의 무자비한 공격에 어쩔수 없이 일주일을 버티지 못하고 퇴각해버렸습니다. 이 과정에서 미처 난징을 탈출하지 못했던 보통의 시민들은 일본군에게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무작위로 학살을 당합니다. 참고로 아직도 일본은 당시 난징대학살을 그저 '난징사건'이라고 부릅니다.
지옥과 같은 난징의 학살기간에 그래도 한줄기 빛이 있었습니다. 당시 난징에는 지맨스(Siemens)법인의 주재원이었던 욘라베(John Heinrich Detlev Rabe)라는 사람이 이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27년간 중국의 북경,상하이,난징에서 거주를 해왔으며, 독일의 나치 당원이었지만 그때만 해도 나치는 아직 히틀러(Adolf Hitler)가 본격적으로 독일을 장악하고 전쟁을 일으키기 전이었습다. 욘라베는 무자비한 일본군의 만행이 시작되는 것을 두눈으로 목격하자, 자신이 일본의 동맹국인 독일인이라는 신분을 이용하기로 하고, 동시에 평소 친분이 있던 남경에 거주하였던 주재원, 외교관등 외국인들을 모아서 신속하게 조직을 만들고, 비교적 안전한 외교관 건물 및 대학교건물 등을 중심으로 소위 '안전지대'를 설치 합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집도 오픈하여 약 650명의 중국인들을 숨겨주고 먹을 것을 제공했습니다.
상상해보면 당시 난징에서 죽음을 피할 수 있는 공간은 어쩌면 욘라베와 그의 친구들이 만들어낸 공간말고는 거의 없었을것 같습니다. 또한 그는 일본군의 폭격을 피하게 하기 위하여 안전지대에 독일의 나치깃발 '하켄크로히츠(Hakenkreuz)' 를 걸어두는 기지도 발휘했습니다. 나치 깃발은 공중폭격을 하는 일본군의 입장에서는 폭격을 하기에 부담스러운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일본군의 무자비함은 상상을 초월한 수준이었습니다. 그들은 점점 안전지대까지도 침략하여 중국인을 공격하고 살해했습니다.
사실 당시 남경은 비록 중국인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일본의 총칼앞에 안전하지 않았습니다. 욘라베 본인도 이를 알고 있었지만, 어떻게든 일본의 야만행위를 막기위해서 그는 외국인 친구들과 함께 '난징 국제 위원회'를 공식조직하였고,여기의 대표가 되어 일본정부와 협상을 시도합니다. 비록 일본군이라도 하더라도 서양 외국인을 무조건 학살하기는 부담스러웠으며, 그런 외교,주재원의 모임으로 이루어진 국제위원회 대표가 직접 협상을 하자,일본은 어쩔 수 없이 잠시 학살을 멈추고 협상의 테이블에 앉게 되었습니다.
3. 욘라베의 비극과 감사함을 잊지 않았던 난징 사람들
형식적으로 협상에 임한 일본은 욘라베의 조건들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만, 이때 욘라베와 난징 국제위원회가 얻어낸 '몇일간의 협상의 시간'과 국제위원회가 만들어낸 난징내의 '피난처'들은 결과적으로 당시 난징에 남아있던 시민들 약 25만명 이상이 탈출하거나, 숨어서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결정적 '시간'과 '공간'이 되었고이는 난징사람들의 가슴속에 잊혀지지 않는 감사함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대학살이 끝난뒤 욘라베는 일본에 의해서 중국에서 강제로 추방당한뒤 조국으로 돌아갔지만조국인 독일은 그에 대한 여러가지 오해를 하게되고, 결국 엄청난 고초를 겪게되었습니다.그리고 자국에 있던 재산도 모두 잃게되어 가난한 삶을 살았습니다. 중국은 이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고, 남경시와 시민들은 스스로 돈을 모아서 과거 자신들의 목숨을 살려준'푸른눈의 의인(義人)'에게 경제적원조를 함으로써, 감사의 마음을 전달하였습니다. 아시다시피 난징에 가면 '대학살기념관'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 샤오펀치아오 (小粉桥)라는 곳에는 당시 욘라베가 자신의 집을 이용하여 중국인들 대피시켜주었던 그 당시의 집과 기념관이 있습니다. 일본이라는 나라가 온 군대를 동원하여 무고한 시민 30만명을 학살한 그 날 그 곳에는, 한명의 외국인이자 주재원이 25만명을 살린일도 있었음을 기억할수 있으면 좋겠습니다.